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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충웅의 종횡무진 시사칼럼] 위협받는 노동인권...'행동하는 양심' 그가 그립다!:가디언21

[최충웅의 종횡무진 시사칼럼] 위협받는 노동인권...'행동하는 양심' 그가 그립다!

고 조영래 변호사 32주기를 추모하며
'전태일 평전' 출판, 피복노동자 삶 알려
민변 출범 주도하며 각종 인권사건 맡아
법비들 판치는 세상에...엄히 경고하시길

가디언21 | 기사입력 2022/12/08 [02:04]

[최충웅의 종횡무진 시사칼럼] 위협받는 노동인권...'행동하는 양심' 그가 그립다!

고 조영래 변호사 32주기를 추모하며
'전태일 평전' 출판, 피복노동자 삶 알려
민변 출범 주도하며 각종 인권사건 맡아
법비들 판치는 세상에...엄히 경고하시길

가디언21 | 입력 : 2022/12/08 [02:04]

노동인권 후진국으로 전락하나

 

화물연대 파업과 관련해 윤석열 정부가 협상을 거부하고 초강경 대응으로 일관하는 가운데 국제노동기구(ILO)가 즉시 개입함으로써 국제 노동인권 문제로까지 비화되고 있다. 정부·여당이 화물 운송자들의 열악한 처지를 깡그리 무시한 채 얼러대면서 일방적으로 기업주들의 편만 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지난해 4월 ILO 핵심협약 비준과 올 4월 발효로 뒤늦게 '노동인권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한국이 불과 몇개월 만에 자칫 ‘노동·인권 후진국’이라 불릴 수도 있게 된 상황에 내몰린 것이다. 이런 시점에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전태일 열사가 떠난 지 50년, 조영래 인권변호사가 <전태일 평전> 원고를 완성한 지 44년, 그 초판이 나온 지 37년이 지났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이후 노동현장의 열악함은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노동인권 수호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조 변호사의 빈 자리가 더욱더 크게 느껴진다.

 

요절한 노동인권 변호사 조영래

 

오는 12월 12일은 고(故) 조영래 변호사가 우리 곁을 떠난 지 벌써 32주년이 되는 날이다. 고인은 1980년대 인권변호사로 종횡무진 눈부신 활약을 하다 1990년 갑자기 폐암으로 불과 43세에 요절했다.

 

                  조영래 변호사의 장례식 장면.

 

그는 1963년 경기고 3학년 때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비분강개해 맨앞에 서서 반대 시위를 주동했다. 이 사건으로 정학 처분을 당했지만 전체 수석으로 서울대 법대에 입학한 수재 중 수재였다.

 

1971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사법연수원에서 연수 중 이신범(전 국회의원), 심재권(전 국회의원), 장기표(신문명정책연구원장) 등과 함께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작된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되어 1년 반 동안 옥살이를 했던 민주화 운동가였다.

 

그 당시 다음과 같은 유명한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조영래가 붙잡혔을 당시 이종찬 전 국정원장이 중앙정보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 전 국정원장의 기억에서 그의 인간적인 진면목을 찾을 수 있다.

 

"어느 날 수사관들이 날 보고 '거물이 하나 들어왔다'고 하더군. 누구냐니까 조영래라는 거야. '그 사람이 왜 거물이냐' 하니까 '이놈은 때릴 필요가 없다' 이거야. 잡혀온 주제에 수사관들한테 조서를 그렇게 작성하지 말고 이렇게 작성하라고 지도를 한다는 거야(웃음). 다른 사람한테 죄를 뒤집어 씌우지 않고 자기가 했다고 하면서 말이지. 수사관들이 감복을 한 거지. 인격적으로 조영래가 이겼다면서 말이야."

 

                  고(故) 조영래 변호사와 '전태일 평전' 책표지.

 

전태일 열사의 분신소식을 듣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사법시험을 준비하다가 1970년 11월13일 청계천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의 분신 자살 사건을 접하고 바로 자기 자신의 일처럼 달려가 누구보다도 더 가슴 아파했던 진정한 휴머니스트였다. 전태일은 열여덟 살 때부터 겪은 노동 현장의 참상, 그리고 그 배후의 사회 모순을 해결하려 몸부림치다 끝내 분신 자살했다.

 

1973년 만기 출소한 조영래는 다시 민청학련 사건의 관련자로 수배당해 6년 간 외진 옥탑방 등을 전전하며 도피 생활을 이어갔다. 이 가운데 3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전태일의 청계피복노조 동료들과 유가족을 만나 이들의 증언을 취합해 일회성 사건으로 잊혀질 뻔한 전태일의 삶을 살을 붙여 생생히 고발했다.

 

깨알같이 적은 공책 7권 분량의 ‘전태일 일기’를 바탕으로 조영래가 쓴 <전태일 평전(부제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은 익명으로 출판되었고, 노동자들의 비참한 실상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내용이 일파만파를 불러일으켰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전태일의 유지를 세상에 전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이 책의 저자가 조 변호사로 공개적으로 알려진 것은 그가 죽은 이후이다.

 

경기중-경기고 선배인 이 전 국정원장은 1980년 '서울의 봄'으로 조영래에 대한 수배가 풀리자 "인재를 살려야 한다"며 법원행정처장을 직접 찾아가 그를 사법연수원에 다시 들어가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검사시보 시절, 조영래의 다짐

 

조영래는 1981년 12월 검사 시보 시절 쓴 일기에서 "어떤 경우에라도 친절한 자세를 흐트리지 않도록, 어떤 경우에도 조금이라도 권력을 가진 자의 우월감을 나타내거나 상대방을 위축시키거나 비굴하게 만드는 일이 없도록, 다른 것은 다 못하더라도 이것만 해낼 수 있다면 더 이상 좋은 수가 없겠다"라고 토로했다.

 

그는 또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아도 좋다고 한다면, 혹은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인간성에 거는 우리의 모든 신뢰와 희망은 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라고 반문했다.

 

뒤늦게 변호사가 된 이후에도 탄탄대로 출세가도를 초개같이 버리고 오직 민주화 운동가와 노동 운동가들을 변호하는 데 앞장선 진정한 인권변호사였다.

 

고인은 1983년 변호사 사무실을 열고 '망원동 수재 사건 집단소송', '전화교환원 이경숙 사건(여성 조기정년제 철폐 사건)' '연탄공장 공해 피해자 박길래 손해보상 사건(상봉동 진폐증 사건)', '<한겨레신문> 압수수색 취소청구 사건', '보도지침 폭로 사건' 등을 변론하며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날렸다.

 

특히, 1986년 6월 서울대 여학생 권인숙(현 국회의원)이 부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던 도중 성고문을 당한 사건의 변호사로 더 유명해졌다. 사법부의 불공정한 재판으로 인해 진상이 밝혀지지 못하다가, 변호인단과 여성단체의 고발과 항의·시위 끝에 사건 고발 2년이 지나서야 조사담당자인 문귀동에게 법적 처벌이 내려졌다.

 

그 당시 필자는 불과 2년차 햇병아리 기자였는데, 법정에서 열정적이면서도 논리정연한 변론을 펼치며 재판부와 방청인들의 심금을 울리던 그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고 귀에 쟁쟁하다.

 

1988년 5월 28일 조 변호사의 제안으로 당시로는 생소했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이 51명의 창립회원으로 출범하였다. 민변은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임수경·문익환 목사의 방북 사건 등에 이어 보안사 민간인 사찰에 대한 윤석양의 양심선언,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등에서도 적극 변호했다.

 

1990년 12월 12일 폐암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가 전해지자 전국에서 민주화 운동가들은 물론 일반 시민들도 자신의 일처럼 슬픔을 가누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는 보수 정당과 극우 단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020년 뒤늦게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국가 유공자로 인정해 그의 영정 앞에 국민훈장 모란장을 바쳤다. 유고집으로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둘 수는 없습니다>(1991), <조영래 변호사 변론 선집>(1992) 등이 있다.

 


조영래 변호사 25주기 추모행사가 열린 2015년 12월, 문재인 전대통령(당시 새청년민주연합 대표)과 박원순 전 서울시장, 천정배 국회의원 등이 참석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망나니 검사들과 영혼없는 판사들에 '경고'

 

이 전 국정원장은 이렇게 회고했다. "조영래는 리더십도 탁월했고 온화하고 겸손한 인품에 끈질기고 치밀한 성격, 비상한 머리에 글솜씨도 뛰어나고 이론에도 밝은, 참으로 아까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마흔셋에 세상을 떴으니 너무 일찍 죽었다. 그런 사람이 나중에 대통령이 되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경기중·고-서울법대-사법고시 등 엘리트 코스를 간판으로 삼아 얼마든지 고관대작, 금은보화,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죽는 순간까지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적 책임)'를 몸소 실천한 세상의 빛이자 소금이었다.

 

고인은 불과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타계해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 묘지에 묻혀 있다. 그의 묘 앞에서 참배하자니 너무나 애석해 숭모의 눈물이 복받쳐 올랐다.

 

신자유주의의 쓰나미가 들이닥치면서 '부익부 빈익빈', '약육강식', '극단적 이기주의'가 판치고, 윤석열 정부 출범후 노동인권 현장이 더욱 열악해지고 있는 세태라 더욱 그러하다.

 

그는 법조인으로서 이 시대에 너절하게 발에 채이는, 오직 고관대작과 금은보화에만 눈이 먼 '법비(法匪)' 들과는 아예 차원이 다른 올곧은 귀감의 삶을 살았다.

 

돈과 권력에 취해 거짓말과 궤변을 일삼는 사이비 법조인들이 설쳐대는 이 시대에 조 변호사같은 '행동하는 양심'을 찾아보기가 모래사장에서 바늘찾기 만큼이나 어렵다.

 

검찰공화국에서 무소불위의 망나니 칼춤을 추면서 날뛰는 검사들, 눈치만 남아 소신없이 판결하는 영혼없는 판사들 ,그리고 양심을 팔아 오직 돈과 권력만 좇는 저열한 변호사들을 보면서 그가 더욱 더 눈물나게 그리워진다.

 

▲     ©가디언21

※ 최충웅 칼럼니스트는 경향신문 걸프전 종군특파원을 지냈다. 문화일보 재직 중 북ㆍ중 국경 기아현장 밀착취재로 한국기자협회가 주는 '이달의 기자상'을 수상했다. 사회부 사건/행정팀장, 국제문제 전문기자를 거쳐 국회 국방위 정책보좌관으로 근무한 적도 있다. 지금은 <바른언론실천연대> <새언론포럼>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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