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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도 중요한 날이지만, 48년 전의 '10.24'도 기억해 주십시요. 동아일보(방송) 기자, PD, 아나운서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피맺히게 외쳤던 날입니다:가디언21

10.26'도 중요한 날이지만, 48년 전의 '10.24'도 기억해 주십시요. 동아일보(방송) 기자, PD, 아나운서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피맺히게 외쳤던 날입니다

2022.10.24.

김기만 바른언론실천연대 | 기사입력 2022/10/24 [00:42]

10.26'도 중요한 날이지만, 48년 전의 '10.24'도 기억해 주십시요. 동아일보(방송) 기자, PD, 아나운서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피맺히게 외쳤던 날입니다

2022.10.24.

김기만 바른언론실천연대 | 입력 : 2022/10/24 [00:42]


오늘(24일) 늦은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는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48주년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아울러 <제28회 통일언론상>과 <제34회 안종필 자유언론상> 시상식도 열렸습니다. 뒤의 두 상은 '동아투위'(동아 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가 만든 상입니다.

 

역사의 시계바늘을 반세기 가까운 1974년 10월 24일로 돌려봅니다. 이 날은 유엔(UN)에 가입도 못한 국가이면서도 '유엔의 날'이라 해서 정부가  공휴일로 정한 날이었습니다.

 

오전 9시 정각 동아일보 편집국(현 일민미술관 3층)에 모인 기자, PD,  아나운서들은 한가운데 기둥에 내걸린 '자유언론실천선언' 족자를 바라보며 숨을 죽였습니다.

 

이윽고 기자협회 장윤환 분회장이 기자총회 개최를 선언했고,  홍종민 총무는 '선언문'을 떨리는 목소리로 낭독했습니다. 총회를 끝낸 후 기협(記協) 동아일보 분회는 회사측에 기자들의 결의와 선언문 전문(全文)을 이날치 동아일보 1면에 실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회사측은 냉담했습니다. 그러자 당시 기자들의 신망이 두터웠던 청암(靑巖) 송건호(宋建鎬) 편집국장이 기자들과 회사측을 거중조정한 끝에 이날 자정을 넘어 24일자 신문이 겨우 찍혀  나왔습니다. 당시 동아일보는 석간이었기 때문에 정상적이라면 낮 12~오후 1시에 초판이 나오는 게 정상입니다. 여하튼 '자유언론실천선언' 전문과 기자들의 결의 관련 기사가 1면에 3단(段)으로 보도된 것을 보고 다수의 기자들이 서로 껴안고 울음을 터뜨리며 감격해 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상황은 녹록치 않게 흘러갔습니다. 당시 박정희 군사독재철혈 정권은 1969년에 '3선개헌'을 완성한 뒤, 1971년의 '위수령' 발동에 이어 1972년에는 '10월유신'으로 영구집권의 길을 텄고,  연속되는 긴급조치 속에 '국가비상사태'까지 선언하는 등 국민 압살(壓殺)을 더욱 강화하고 있었습니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언론자유가 처참하게 유린되는 것을 목도하며 뭔가  싸울 언덕을 찾던 중, 1974년 3월 33명의 기자들이 '전국 출판노조 산하 동아일보 분회'를 만들어 한국 언론사상 첫 노동조합의 발걸음을 뗍니다.

 

그러나 회사는 이들에 대해 해고, 정직 등의 강경책으로 맞섰고, 노조는 서울시로부터 노조 설립신고증을 반려받아 엉거주춤한 상태가 됐습니다. 기자들이 기자협회 분회를 생각해낸 건 이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때마침 기자협회장이 동아일보 김병익(金炳翼)기자(훗날의 문학평론가)였기 때문에  이를 활용하기가 수월하다는 점도 작용했던 듯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동아일보 경영진은 기자들과 멀어지는 대신 정부측에 기울어졌고, 마침내 <천주교 인권회복 기도회> 보도 여부를 둘러싸고 팽팽히 맞서다가 1974년 11월 12일자 신문이 발간되지 못하고 결호(缺號)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기자들과 경영진은 결국 루비콘 강을 건너게 됐고, 이후 그 유명한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를 맞게 됩니다.

 

1974년 12월부터 시작된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는 상식 있는 누가 봐도 정부가 중앙정보부 등을 동원해 광고주인 기업을 압박,  광고를 내지 않도록 종용하거나 강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오늘날 촛불시위의 원조(元祖)라고나 할 시민들의 격려광고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시민광고 1호로 나중에 밝혀진 김대중 씨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의 광고가 동아일보 광고면을 채워나갔고, 국민들이 격려광고 보는 재미에 빠져들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동아일보 변절하면 이민 간다" 등 눈물을 쏙 빼는 감동의 글이 끝갈 데 없이 이어졌습니다.

 

한편 기자들은 회사에서 "언론자유실천"을 외치며 취재와 농성을 병행했습니다. 마침내 견디다 못한 정부가 칼을 빼들었습니다. 1975년 3월 17일 동아일보에서 농성중이던 기자, PD, 아나운서 160여 명은 정부인지 동아일보인지가 동원한 폭력배들에 의해 회사에서 거리로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47년 9개월이 흘렀습니다. 내년 1월이면 48년, 오는 2025년 1월이면 반세기가 됩니다.

 

그렇게 쫓겨난 분들이 만든 '동아투위'에는 본인 의사로(개인적으로) 회사에 돌아간 경우 등을 빼고 모두 113명이 속해 있으며, 이미 38명이 별세했습니다. 회원 다수가 80대인 생존 노기자(老記者)들의 꿈은 단 한 가지입니다. 동아일보가 명백히 사과하고, 전원에게 복직명령을 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80대인 투위 위원들이 다시 언론인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명예를 회복하고, 쫓겨났던 동아일보 사옥에 한번 들어가 본 뒤 바로 사직하는 것이지요.

 


저는 동아투위 선배들의 고귀한 정신을 이어받고자 1987년 동아일보 노조를 만들 때 앞장섰습니다. 제가 쓴 '노조 창립선언문'에 "1974년 3월 선배들이 만들었던 노조창립의 정신을 계승한다"고 못박았습니다(사진 참조).

 

동아일보 노조위원장 때는 회사측과 동아투위 문제 해결을 도모해 거의 성사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습니다.

 

올해에도 동아일보 최고위층에 "동아투위 문제의 해결 없이는 동아일보는 영원히 정론지가 될 수 없다"며 "해결을 위한 성의를 보이라"고 촉구했지만 마이동풍입니다.

 


오늘 기념식이 끝나고 동아투위 선배들과 식사를 하면서 가슴이 저몄습니다. 이부영 선배님(80,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장,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우리 나이에는 잘 먹는 게 건강의 길입니다"라고 외치시는데, 눈물을 참기 힘들었습니다(회식 사진).

 

세계 언론사상 48년 간 해고상태는 최장기 기록입니다. 한국언론사의 치욕입니다. 동아일보는 반성하고, 사과하고, 복직시키고, 보상도 해야 마땅합니다. 48년간의 해고는 최악의 인권유린이고 범죄입니다.

 

동아일보 김재호 사장과 경영진에게 엄숙히 경고하고 요구합니다. 동아투위 문제를 빨리 해결하십시요.

시간을 놓치면 훗날 역사와 국민이 심판할 것입니다.

 

김기만. 전 동아일보 파리특파원, 노조위원장/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사장/현, 바른언론실천연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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