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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공(容共)조작 '五松會사건', 痛恨의 40년을 피눈물로 살다 가신 조성용 선생을 기립니다:가디언21

용공(容共)조작 '五松會사건', 痛恨의 40년을 피눈물로 살다 가신 조성용 선생을 기립니다

2022.08.29.

김기만 바른언론실천연대 | 기사입력 2022/09/01 [20:37]

용공(容共)조작 '五松會사건', 痛恨의 40년을 피눈물로 살다 가신 조성용 선생을 기립니다

2022.08.29.

김기만 바른언론실천연대 | 입력 : 2022/09/01 [20:37]

지난 2004년 탈북(脫北)했고, 서울시청에서 탈북민 담당 계약직 공무원으로 일하던 유우성 씨(43). 

 

10년 전인 2012년 '탈북민 200명 명단을 북한에 빼돌렸다'는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게 되면서, 그의 삶은 암흑으로 바뀝니다.

 

2년 여의 법정 공방 끝에 유 씨는 2014년, 무죄 판결을 받습니다. 그러나 심신은 망가졌습니다.

 

유 씨가 혐의를 받은 것은 아마도 탈북자였기 때 문일 것입니다.  말도 안되는 인권유린이지만 "탈북자이기 때문에 이렇게 엮었겠구나"  정도의 상상은 해봅니다. 물론 그를 간첩으로 몰아붙였던 이시원 검사가 청와대 최고 요직의 하나인 공직기강비서관에 발탁되어 근무하는 어불성설의  인사(人事)는 전혀 다른 문제이고요.

 

#1. < 후배들 용공(容共) 조작 사건에서 갑자기 수괴(首魁)로 영입된 KBS 음악PD>.

 

지난 26일 별세해 28일 '시민민주장'을 치른 全北지역 민주, 평화, 애향운동의 큰 어른 조성용(85, 趙成湧) 선생의 경우는 유 씨와는 전혀 다른 천인공노할 용공조작의 대표적인 희생자입니다.

 

전두환 철혈 군사독재 시절이던 지난 1982년 4월 하순, 전북 군산제일고 교사 5명이 당국에 체포됩니다. 교사들이 4.19 의거(당시는 혁명으로 정의되지 않고 주로 '義擧'로 불렸음) 기념행사를 하는 과정에서 시인 김지하(金芝河)의 담시(譚詩) 오적(五賊)을 낭송했으며, 시국토론을 했다는 것이  혐의였습니다.

 

주동급 교사 5명이 주로 학교 뒷산의 소나무 아래에 서 자주 모였다고 해 '오송회'(五松會)라는 허구의 단체가 경찰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경찰당국은 여기서 잔머리를 또 굴립니다. KBS  근무 전후 군산제일고 교사를 잠시 했고, 사건을 꾸밀 당시에는 KBS 남원방송국 간부로 일하고 있던 조성용씨를 체포해 이 사건의 수괴로 만들어 버립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냐고요? 가능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없다고 단언하진 못하겠습니다. 

 

불과 10년 전의 이시원 검사를 보십시요. 우리나라 검찰, 경찰, 국정원은 때로는 권력이 시키면 남녀 성을 바꾸는 일 외에는 거의 다 해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5년 뒤인 1987년 1월, 서울대 2년생 박종철이  물고문  질식사를 당했음에도 경찰은 "책상을 '턱' 치니 '억' 하고 죽더라"고 발표하는 만행을 저질러 국민적 분노를 샀습니다.

 

그 다섯 달 후에는 연세대 2년생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습니다.

애민애국(愛民愛國),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국정의 기본으로 삼지 않고, 정권안보에만 혈안인 된 군부정치 때 그런 비극은 기승을 부렸습니다.

 

#1. <'五松會' 용공조작 목적은 따로 있었다!>.

 

교사 5명의 4.19 기념식과 시국토론. 별 탈없이 넘어갈 수 있던 사안이 커진 것은 5명 중 하나인 박 모  교사의 집에서 월북(越北)작가인 오장환(吳章煥) 시인의 시집 <병든 서울>이 발견됐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 경찰이 이들을 집요하게 추적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교사 중 이광웅 씨가 5.18  광주 민주화항쟁  핵심의 한 분이었던  윤한봉 씨(당시 34세)의 매제라는 소문이 있었던 때문이었습니다(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

 

그러나 경찰의 이같은 추적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지요. 왜냐하면 도피생활 중 한때 이광웅 교사 집에서 숨어지내기도 했던 윤 씨 는 1981년 4월 밀항에 성공, 6월엔 미국 워싱턴에 도착했으며, 로버트 케네디 의원 등의 도움으로  이미 정치적 망명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광웅 씨는 1992년 53세로, 윤한봉 씨도 2007년 59세로 각각 사망했습니다.

 

# 2. <'제 2의 이근안'에 당한 지독했던 '고문'/40년의 심신 통증>. 

 

교사 5명을 포함한 9명은 1982년 4월 하순 체포된 후 구속영장이 발부될 때까지의 20여 일간 가족은 물론 변호인 접견조차 받지 못한 채, 전주 대공분실에서 지독한 고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조 선생과 교사들은 먼 훗날 '전주의 이근안'으로 불렸다는 고문경찰관 신 모씨로부터 전통적인 '밥 굶기고 잠 안재우기'는 물론 '써니텐'(온 몸을 묶고 엄지손가락에 전기를 통과시키는 고문, '통닭구이'(몸에 철봉을 매단 채 얼굴에 먹다만 짬뽕 국물 붓기) 등의 혹독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입이 무거운 조성용 선생도 어쩌다   고문받던 때의 모멸감을 털어놓았습니다.

 

"오래 굶기고 잠을 안재우면 사람이 비참해집디다. 뭐라도 먹을걸 안주나ᆢ. 또 (수사관이) '너 같은 놈은 때려죽여서 레미콘에 버무려 벽에 발라버리면 끝이야ᆢ' 이런 얘기를 들으면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들게 되더만ᆢ. 내게 가장 불리한 범죄사실을 누가 시킨 게 아니라 고문 끝에 내 자신이 썼다는 모멸감이  평생을 짓눌렀어요ᆢ".이럴 때 선생의 눈가는 항상 젖어 있었습니다.

 

# 3. <산화(散化)한 교육, 언론 원로/노병(老兵)은 죽지 않는다. 사라질 뿐이다ᆢ>.

 

조 선생은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1964년 27세 때 문공부 방송문화연구소 연구관이 됩니다. 이어 1965-1972  7년간 KBS에서(서울) 프로듀서로 일했고 앵1년여 간은 문공부 국립영화제작소 감독으로도 근무합니다.

 

그 뒤 1973-1979년중에는 1978년 

한 해 동안 군산제일고에서 교사로 일했고,  1979년부터 다시 KBS에서 근무하다 남원방송국 음악PD(과장ㅡ)이던 1982년 '마른 하늘에  날벼락 격'으로,  반국가단체의 수괴라는 중죄 (국가보안법)를 뒤집어 썼던 것입니다.

 

정권은 굳이 조 선생이 아니라 그런 류의 희생양을 찾던 중이었겠지요. 12.12와 5,18을 거쳐 1981년 2월 체육관 대통령이 된 전두환과 그 일파는 정권의 안정을 위한 대형 공안(公安)사건이 꼭 필요했던 것입니다.  

 

7년형을 선고받았으나 2년 반 복역 후 1985년 출소한 조 선생은 1988년 복권되었고, 동학농민기념사업회 부이사장, 전민련(전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공동대표, 참여자치 전북시민연대고문을 맡으며 전북지역 민주, 평화운동의  버팀목 역할을 해오셨습니다.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나 재임 시절 전북에 가실 때면 우선적으로 찾아뵙거나 전화드리는 분이 조 선생이셨습니다. 조 선생이 문재인 후보께 거침없이 고언(苦言)하는 장면을 함께 하기도 했습니다.

 

#4. <조성용 선생에 대한 추억의 편린(片鱗)들>.

 

조 선생보다 한 살 많지만 20대 말 KBS에서 만나 막역한 사이인 이기명 선생(86.전 노무현  후원회장, KBS 방영 '김삿갓 북한방랑기' 작가)은 "조 선생과는 60년 가까이 친하게 지내면서 좋은 면에서 많이 다투기도 하고 토론을 즐기는 편이었다"며 "사리가 분명하고 불의, 부정을 보면 참지 못하는 분"이라고 평했습니다.

 

군산제일고 제자로 조 선생으로부터 특별한 총애를 받는다는 질시를 받는 김의겸 의원(59, 전 청와대 대변인)은 "민주주의 정신의 구현과 지역의 민주, 평화운동에 그만큼 헌신했던 어른이 없지 않은가"라고 존경의 마음을 표했습니다.

 

전북에서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해온 최형재 노무현 재단 전북대표(59)도 "1980년대 이후 전북지역 민주, 평화, 애향운동에는 선생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게 없다"며 "박학다식하고 사리가 분명해서 어려움이 있을 때면 다 정리해 주시는 진정한 어른이셨다"고회고했습니다.

 

조성용 선생과 오송회 관련자 전원은 지난 2007년 '진실과 화해위원회'에서 '재심'과 '명예회복'이 결정되었습니다. 이어 2008년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고, 2011년에는 국가배상 판결까지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어찌합니까? 5명 중에 전성인 선생은 이민을 가버렸고, 이광웅 국어 교사는 옥살이와 고문의 후유증이 겹쳐 1992년 53세로 사망했 습니다. 그리고 구속 23년 만인 2008년 법원에서 승소해 방송국 복직이 가능해진 조성용 선생은 이미 정년을 넘겨 단 하루도 더 언론인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26일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조국을 찾겠노라 말 달리던 선구자ᆢ". 늦여름 빗소리 속에 이런 노랫말이 떠오릅니다.

 

40년간 한결같이 지역을 지키며, 풍찬노숙(風餐露宿) 하듯이  밑바닥에서 민주, 평화, 애향운동에 헌신해온 분을 보내는 빈소치고는 좀 쓸쓸하다는 세평(世評)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선생님, 안식을 기원합니다.

 

  © 가디언21

 

* 사족(蛇足) 하나: 군산제일고 교사 5명을 체포, 간첩단 사건으로 포장하던 경찰은 처음 이 사건에 '오성회'(五星會)라는 이름을 붙였다. 모두가 전북 익산시 남성고(南星高) 출신이라고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한 명이 남성고 출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급히  다시 만든 이름이 오송회(五松會)였다(이광철 전 국회의원 제공). 

 

 


둘. 사진 3, 조성용 선생(뒷줄 가운데)이 군산제일고 교사이던 1978년 이광웅 교사(앞줄 오른편)와 전북 고창 선운사를 방문했다.

 

김기만. 바른언론실천연대(언실련) 대표/전 동아일보 파리특파원, 노조위원장/전민동(전북민주화동우회) 창립회원/청와대 춘추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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