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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민(山民) 한승헌(韓勝憲) 선생님 별세에 곡(哭)함:가디언21

산민(山民) 한승헌(韓勝憲) 선생님 별세에 곡(哭)함

가디언21 | 기사입력 2022/04/22 [17:09]

산민(山民) 한승헌(韓勝憲) 선생님 별세에 곡(哭)함

가디언21 | 입력 : 2022/04/22 [17:09]

1957년 23세에 8회 고시 사법과에 합격, 1962년 검사로 출발한 뒤 1965년부터 변호사를 시작해, 만 60년간 이 땅의 최고 법조인중 한 분이셨던 산민(山民) 한승헌 선생님이 20일 밤 10시 별세했습니다.

 

선생님은 노환으로 우석대 한방병원(전주)에서 운명했습니다.

향년 88세(1934년생)였고, 부인 김송자 여사와 슬하에 3남 1녀가 있습니다.

 

어르신의 빈소는 서울(강남) 성모병원 장례식장 12호실에 꾸려졌습니다.

25일 6시 50분에  발인하고, 전날인 24일 오후 5시에 추도식(장례식장 2층 예식실)이 있습니다. 장지는 '광주 5.18 민주묘지'입니다.

 

장례는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집니다. 상임 장례위원장은 함세웅 신부님, 공동위원장은 여러 여러 어른들이 맡으십니다. 선생님은 민주화운동과 사법개혁 공로로 2018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습니다.

 

우리나라 인권변호사 1호는 고 이병린 변호사(1911년생)님으로 기억합니다. 산민  선생님과 비슷한 '1세대 인권변호사'라면 이돈명(1922년생), 홍성우 조준희(이상 1938년생), 황인철 변호사(1940년생) 등인데 이제 모두 고인이 되셨습니다. 홍성우 변호사님도 지난 달 별세하셨지요.

 

문재인 대통령이 

오늘 일찍 문상했군요. "저를 아주 아껴주셨는데 너무 애통하다"며 "사회적으로 큰 어른이셨고 후배 법조인들의 큰 귀감이셨다"고 말했습니다. SNS에는 노무현 님이 대우조선 사건 관련해 구속됐을 때 공동변호인 했던 기억, 노무현 대통령 탄핵 때 공동대리인 했던 추억까지 언급했습니다. 애틋함이  느껴졌습니다.

 

산민 선생님은 60년의 활동기간 동안 우리 사회에 너무 많은 족적(足跡)을 남기셔서, 뭐라 몇 마디로 그려낼 수 없는 문자 그대로 '큰 바위 얼굴'이셨습니다.

검사, 변호사, 출판인(삼민사), 시인,  작가, 고위 공직자, 서예가였고 국내 최고 권위의 '저작권 전문가'이기도 했습니다. 저작권 공부를 하신 이유를 여쭙자 "감옥 갔다온 뒤 정부의 강압으로 한동안 변호사 자격을 잃어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시작했다"고 말씀하신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을 보면 지식과 지혜에 겸손의 인품이 조화를 이룬 인향(人香)이 가득한데다, 여기에 당신 특유의 고품격 유머와 해학 능력까지 뛰어나셨지요. 모시고 있으면 그냥 감동받게 되는 분이셨습니다. 

 

평소에도 품격 높은 유머와 해학

으로 선후배들을 훈훈하게 하셨는데, 당신도 여기에는 좀 애착을 가지셨는지 '한승헌 변호사의 유머기행'(2007), '산민객담(2005),유머수첩'(2012)을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식의 유머를 하시죠.

1화. "김특파원, YS가 '국토를 관통하는 관광도시'를 어떻게 발음하지?" 그야 쉽죠. 국토를 '간통하는 강간도시 ᆢ'.

"그럼 YS가 유머를 뭐라 하는지 아나?". "모르겠는데요". "루머라 하네". "비서진들은 혀가 짧아서 그렇다고 하는데, 내 보기엔 그 양반이 영어 유머를 진짜  루머로 아는 것 같아.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유니버스 대회라고 하는 걸 보면 서울대 철학과 청강생이라는 건 맞는 것 같제?".

 

2화. "김 기자, 골프 잘 치나?". "파리특파원 때부터 했으니 좀 하는 편입니다만ᆢ". "난 좀 노력해 봤는데 안되데. 그런데 내가 위안을 얻은게 하나 있소". "뭡니까, 선배님". "박인비가 TV에 나와서 그러더만. 골프는 하체의 힘과 허리회전으로 한다". "그렇다고 하죠ᆢ". "그러니 내 이 빈약한 하체에서 무신 골프가 되겠어? 

골프 안되는 게 내 운동신경 때문이 아니라 천부적 신체조건이 나쁜 탓이라는 걸 알고 안도했네". "네ᆢ".

 

3화. (커피를 마시던 중), "이봐요, 검사들이 나를 자꾸 '빨갱이 변호사'라 부르는데 그건 틀렸어". "왜요?". "난 아메리카노를 즐기거든ᆢ".

 

전북은 법조(法曺)의 초석을 다진 '대한민국 법조 3인'을 배출한 법조 명문의 고장입니다.

 

'사법의 화신'이라 불린 초대 대법원장 가인(佳人) 김병로 (1889-1964).

서민의 법관으로 추앙받는 가난하나 위대했던 판사 김홍섭(1915-1965).

소신의 대명사인 '대쪽검사' 최대교(1901-1992).

평생 '대쪽 딸각발이 변호사'로 일관한 한승헌 선생님은 '법조 4인'에 추대되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1965년 소설가 남정현의 소설 '분지(糞地) 필화사건' 무료변론을 시작으로, 이 나라 질곡(桎梏)의 민주화 과정에서 일어난 거의 모든 사건의 억울한 피고인들을 변론했습니다.

일일이 거명하기도 힘들지만 통일혁명당 사건, 남산 부활절 예배사건, 울릉도 간첩단 조작사건, 민청학련 사건, 김지하 오적(五賊)사건,  인혁당 사건, 전두환 피해자 양심수 사건, 민중교육지 사건, 인천 5.3 사건, 임수경 문익환 황석영 방북(訪北 )사건,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건, 그리고 납치사건 등 김대중 대통령 관련한 모든 사건까지.

 

지인들이 "한 변호사가 변호하면 다 감옥 간다"라고 농담하면 어르신은 "맞아. 그런데 지금까지 풀려나지 않은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라며 유쾌하게 웃으시곤 했습니다.

 

선생님은 평생 세번 옥고를 치르셨는데, 1972년의 첫 옥고는 선생님께서 좀 자랑스러워하는 감옥살이였습니다. 당시 유럽간첩단 사건으로 사형된 김규남 의원과 관련해 '여성동아'에 <어느 사형수의 죽음 앞에서-어떤 조사(弔辭)>라는 글을 씁니다. 선생님은 반공법으로 구속됐고, 감옥에

갔습니다. 8년 5개월간 변호사 자격이 정지되었습니다. 

 

먼 훗날 한 선생님은 최종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선생님은 "권력자에 의한 사법농단이 절대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 이는 국가의 사법폭력이다"라고 일갈(一喝)했지요.

 

1961년 시집 '인간귀향'을 시작으로 시집(4권), 수필집, 수상집, 법조 관련 전문 서적, 변호사 일대기, 저작권 전문서, 유머집, 심지어는 '그 남자 문재인'(2012, 공저)이라는 책까지 종횡무진 분야를 넘나들여 45권의 저서를 남기셨습니다(사진).

 

선생님은 언제나 바른 길,  정의로운 길, 정직한 길만 가시고자 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홍성우 변호사 등과 함께 1988년 '민변'(民辯,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창립자였습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발기인이셨고, 1988년에는 한겨레신문 창간위원장이었습니다. 

 

1973년 남산 부활절 예배사건 주역인 박형규 목사님을 변호하는 과정에서 기독교 신자가 된 선생님이 감사원장을 맡게 되는 과정에, 인격 고매한 어른들의 유머 향연이 황홀하게 펼쳐집니다.

 

고 박권상 동아일보 주필(KBS 사장)과 함께 국회의원이나 도지사 공천을 준다 해도 절대 받지 않아 김대중 선생을 속상하게 했던 산민 선생이 1998년 3월 청와대로 갑니다. DJ가 묻습니다. "한변, 교회 다니지요?" "예, 신자이긴 한데 사이비죠. 가다 말다 그럽니다". "어떻든 크리스찬들의 3계명이 있지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알지요?" "예. 알긴 합니다만ᆢ". "그럼 됐어요. 감사원장 하세요. 그럼 날마다 '감사'하게 되지 않겠어요?ᆢ"

 

한 선생님의 후일담에 따르면 DJ가 그렇게 치고 나오는데 달리 반박을 못하겠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감사원장이 됐습니다. 

 

63세에 평생 처음 맡는 전무후무한 관직이었죠.  정작 일하면서 보니 정부 주요 공직자의 연령 제한이 70세인데 감사원장만 65세로 되어 있었습니다. 선생은 정부, 국회와 협력해서 70세로 바꾸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지인들은 당연히 선생님도 새 조항에 따라 임기(4년)를 다 하시리라 생각했지요. 그런데 선생은 이 수정조항의 부칙에 "현재 재임하는 원장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적시해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감사원장 임기의 절반도 안되는 1년 6개월 재임하고, 1999년 9월 말, 만 65세에 표표히 퇴임했습니다. 감사원장 취임 때 신고한 재산총액은 8억 2천만원이었습니다. 이런 분 보셨습니까?

 

선생은 서예에도 일가를 이루어 매년 원단(元旦)이면 지인들에게 '4자성어'를 보내주셨습니다(사진). 2013년의 '도비고원'(道非高遠. 도는 높고 먼 곳에 있지 않다).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사진).

 

고향을 사랑하셔서 '전북출신 민주화동우회'인 '전민동'(全民同) 창립회원이십니다. '재경(在京) 전북도민회' 명예회장이시고요. 언론인 후배들을 아끼셔서 1988년 창립된 '전언회'(全言會.

전주출신 언론인 모임)의 명예회원을 평생 해주셨습니다.

 

1993년 동아일보 파리특파원을 마치고 돌아와 선생을 식사에 모셨을 때 "선생님, 전 41살이니 아직 젊습니다"고 했더니 "이 사람아, 어찌 젊나? 어리지"라고 촌철살인으로 말씀해주시던 선생님이 그립습니다. 

 

사족(蛇足) 같은 얘기 하나 더 하겠습니다.

서울대 출신인 가까운 후배가 어느날 제게 진지하게 묻습니다. "한승헌 변호사님 고향 선배에 고교 선배 되시죠?". "그러네만". "근데 그 분이 전북대 졸업했던데요? 전 당연히 서울법대 출신인 줄ᆢ". 여기까지 말하다 그 후배는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되게 혼났습니다.

 

"서울대 아니면 학교로 알지 않는 속물근성 꽉 찬 놈 같으니. 그래 전북대 맞다. 변호사님은  전주고 30회 수석 졸업생이다. 고향(전북 진안)에 홀로 계신 모친께서 편찮으셨고, 아들이 가까운데 있기를 바라셔서 전북대에 진학했다. 그것도 법대가 아니라 정치학과였어. 그 썩을 놈의 학교로 사람 판별하지 말거라". 

 

당신 자신에게는 "부끄럽지 말자"는 말을 자주 해 자계(自戒)했습니다. 후배들에게는 "입신(立身)에 멈추지 말고 헌신합시다"라는 말을 가장 강조하셨습니다. 

 

시대의 큰 스승, 닮고 싶은 진정한 어르신이 떠나셨습니다. 선생님이 남기신 '인간 향훈 가득한 변호사'는 길이 기억될 것입니다. 배우고 따르겠습니다.

안식을 기원합니다.

 

2022.04.21.

 

고인의 전주고 19년 후배 김기만. '바른언론실천연대' 공동대표/전 동아일보 파리특파원, 노조위원장/청와대 춘추관장(김대중정부)/국회의장 공보수석, 초대 게임위원장(노무현 정부)/한국방송광진흥공사(문재인 정부) 올림.

 

  © 가디언21

 

 

 

 

 


*마지막 사진.

한 공연장에서 자리를 같이 한 전민동(全民同) 회원들. 뒷줄 소리꾼 임진택, 김기만. 앞줄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한승헌 변호사, 기세춘 한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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