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2.0>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상징이다. 2008년 9월 18일 노대통령은 토론 웹사이트 '민주주의 2.0'을 열었다. "자유롭게 대화하되 깊이있는 대화가 이루어지는 시민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개설 취지도 밝혔다. 개방 공유 참여 책임의 '4원칙'을 내세웠다.
'민주주의 4.0'이라는 간판을 내건 단체라면, 이러한 노대통령의 정신과 철학을 이어받고, 정책 비전을 모색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런데 최근 언론에 보도된 '민주주의 4.0'의 '입장문'을 보면, 너무 살벌하다. 자유롭고 깊이있는 토론은 고사하고 지하의 노대통령이 놀라 자빠지지 않으실지 걱정될 지경이다.
"송영길 전 대표의 '내로남불'식 서울시장 출마에 반대한다"고 시작하는 이 입장문은 "사퇴 선언문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민주당의 반성과 혁신의 시험대가 될 이번 지방선거의 가장 핵심지역인 서울시장에 출마하겠다는 송 전 대표의 오판은 자칫 민주당 전체를 오만과 내로남불의 나락으로 떨어뜨려 지방선거 참패로 이어질 위험성이 높다"고 재단해 버린다.
송영길의 출마가 '지방선거 참패'로 이어질 것이라는 논리의 비약도 지나치거니와 입장문의 단어 선택이 거칠고 자극적이기 짝이 없다. 얼핏 들으면 '국힘당 성명'인가 착각할 정도이다.
"송 전 대표의 이런 후안무치(厚顔無恥)한 행동을 국민은 납득 못하고 오만하다고 할 것이다".
이게 과연 이미 '22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고, 대선 패배가 확정되자마자 당 대표에서 물러나 책임을 진 전 대표에게 동료 의원들이 쉽게 할 표현인가?
[도종환에게 묻는다]
36년 전인 1986년, 31세의 중학교사 도종환(67)은 1년 전 시한부 삶을 마감한 아내를 그리는 시 '접시꽃 당신' 한 편으로 국민시인이 된다.
<ᆢ이 어둠이 다하고/새벽이 오는 순간까지/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로 끝나는 '접시꽃 당신' 제목의 이 시집은 300만 부(누적) 이상 팔려 '단일시집 최다 판매' 기록을 갖고 있다.
그런 도 의원이 변했다. 3선에 문체관광위원장도 하고, 문체관광부장관이라는 벼슬까지 해보니 인생이 온통 '여의도 문법'으로 바뀌나 보다. 전교조 출신의 가난한 시인 도종환을 사랑했던 국민들이 그가 대표로 발표한 '민주주의 4.0'의 입장문을 정확히 보면 얼마나 충격받을까?
시인 도종환이 '접시꽃 당신' 발간 5년 후에 재혼했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 많은 소녀 팬들이 '접시꽃 당신' 시집을 불태웠다. 헌책방에는 이 시집이 떼지어 나왔다.
이번 입장문의 책임자가 도종환이라는 것을 알면 시인 도종환의 팬들과 민주당 열성당원들의 실망, 분노는 어디까지일지 상상하기도 싫다.
정치는 언어의 예술이다. 철학자 하이덱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다.
특히 정치인의 언어사용은 '국민 교과서'가 될 수 있다. 그래서 호소력 있으면서도 향기와 비유, 유머, 해학이 넘치는 수준 높은 성명이나 연설에 사람들은 환호한다.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의 연설이 대표적이다. 오죽하면 사람을 판별하는 기준인 '신언서판'(身言書判)에서 언어가 둘째로 꼽히겠는가?
그런 점에서 이 입장문은 내용의 적실성(適實性)을 따져볼 가치도 없는 낙제점이다. 설혹 다른 의원이 거치고 성긴 입장문 초안을 가져왔더라도 도종환이 있기 때문에, 지적받는 당사자도 탄복할 만큼의 언어가 구사된 글을 기대했을 것이다.
이게 무언가? "내로남불식 출마",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후안무치한 행동". '흔들리며 피는 꽃', '담쟁이' 같은 명시를 쓴 당대의 시인이 내놓은 입장문이라고 누가 생각하겠는가?
변했다. 도종환이 변했다. 3선, 장관으로 변한 대신 국민시인은 사라졌다.
촛불시위 때, 그리고 2017년 문재인 후보 언론멘토로 일하면서 '찐문'인 도 의원을 자주 봤다. 대중연설 솜씨도 늘었고 여유도 생겼다. 시인이 아니라 정치인의 모습이 역연했다. 어느 순간, "좋은 시인 하나 잃는구나"라는 걱정이 들었다.
실제로 시가 나오지 않고 있다. 차제에 '22대 불출마'를 선언하고 시인으로 돌아가는 게 어떨까? 계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특정인에 대해 국민시인의 작품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폄하와 증오의 독기서린 입장문이나 내는
것보다는 본인이 가장 잘 하던 일로 돌아가기를 권한다.
우리나라에서 시인 국회의원은 '꽃'의 김춘수(민정당)와 '서울공화국'의 앙성우(평민당)에 이어 도종환이 세번 째다. 3선까지 한 건 그가 처음이다. 그만큼 더 하고 싶은 욕심도 크겠지만 지족(知足)은 더 큰 용기다.
시인 도종환으로 돌아가기를 진심으로 권한다. 영국은 "섹스피어와 인도(印度)를 바꾸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홍영표에게 묻는다]
이번 입장문에 참여한 '민주주의 4.0' 이사진 13명 중 홍영표(65)는 스스로 명단에서 빠졌어야 옳았다.
그는 작년 5월 2일 치러진 민주당 당 대표 경선에서 0.59%라는 그야말로 깻잎 차이로(35.01% 득표) 송영길(35.60%)에게 패했다. 그러기 때문에 이번 입장문 참여는 더욱 신중해야 했다. 아슬아슬하게 진 데서 있을 수 있는 악감정의 표출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홍영표 하면 대우자동차. 그것도 '용접공 위장취업'이 상징이다. 25살이던 1982년 그는 새한자동차(대우자동차, 현 한국GM)에 고졸 용접공으로 들어간다. 1985년 대우차 '노동자 대표'가 되고, 8년을 더 일한 뒤 1993년 퇴사해 한국노동연구소를 꾸리고 소장에 취임한다.
2002년 좀 늦은 45살에 개혁국민당 부평갑 위원장으로 정계에 입문한 그는, 그 해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를 적극 지원한다. 그 뒤 열린우리당 창당에 참여했고, 노무현 대통령의 배려로 2004년 총리실 시민사회비서관이 되어 잠시 '어공"의 길을 걷는다.
2006년에는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체결지원위' 지원단장을 맡고, 이를 기반으로 2007년에는 재경부 'FTA 국내대책 본부장'이라는 중책을 맡는다. 그가 FTA 체결 지원위원회 지원단장으로 일할 때의 위원장이 바로 요즘 논란의 복판에 서있는 한덕수 총리 지명자이다.
홍영표는 2009년 4월 재보선을 통해 18대 국회에 입성했고, 자신이 용접공으로 출발했던 인천 부평구에서 21대까지 내리 4선을 하며 중진으로 성장했다. 작년 당 대표 경선 때 이낙연 전 대표는 중학교 후배인 송영길을 물리치고 '친문'을 대표하는 홍영표를 밀기도 했다.
홍영표와는 개인적인 인연이 있다. 고향(전북) 후배인데다, 1984년 창립된 '전민동'(全民同, 전북 출신 민주화동우회)의 초기 회원이다.
'전민동'은 고은(시인), 한승헌(변호사, 전 감사원장), 기세춘(묵자 연구가), 정동익(전 '동아투위' 위원장) 뿐만 아니라 고 이종린(전 '범민련' 의장), 곽태영(김구 선생 살해범 안두희 응징자), 박상순(진보당), 강은기(민주화운동 출판 전업), 주종환(전 동국대 교수) 등 기라성 같은 전북 출신 민주화운동 어른들이 대거 참여한 조직이었다. 38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역기반 민주화운동 단체가 명맥을 유지하는 것은 '전민동'이 유일하다.
홍영표는 '전민동' 모임 초기에 열심히 참석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발길을 끊었다. 김병오, 장성원, 이석현, 장영달, 김춘진, , 장세환, 소병훈, 홍영표, 김성주, 양경숙 등 전현 국회의원들도 핵심 회원이다.
소병훈 의원은 2대 회장이었다. 지금도 김병오(87, 전 재선 의원) 대선배를 비롯해 이석현(평통 부의장), 장영달(김근태재단 이사장), 김춘진(농업유통공사 사장), 소병훈, 김성주, 양경숙 의원 등은 전민동 일에 열심이다. 필자도 창립회원이다.
홍영표가 '전민동'에 전혀 모습을 안보이길래 몇해 전 전화했다. "국회의원 되더니 본향(本鄕)을 잊었는가? 모임에 좀 나오시게". "예, 선배님. 죄송합니다. 바쁘다는 건 핑계이고 나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뒤로도 그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의원들은 왜 선수(選數)가 많아지면 그에 비례해 오만해지거나 게을러질까? 대우 노동자 시절에 그렇게 모임에 열심이었던 홍영표가 20 수년간 발길을 끊자 회원들은 그의 진정성에 의문을 표현하곤 했다.
홍영표는 사실 송영길과도 동앗줄 같은 인연이 있다. 그의 공천이 위기에 처했을 때, 당시 정세균 대표 앞에서 "홍영표 공천 안주려면 내 사표부터 수리하라"고 버텨 공천을 관철한 사람이 송영길이었다. 똑같이 공장노동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공통점의 두 사람이 화합하면 당에 큰 시너지 효과가 날 것이다. 홍영표가 옛 신세를 좀 갚아도 좋지 않을까?
아꼈던 후배 홍영표에게 당부한다.
첫째로, '친문' 좌장격인 만큼 좀 더 큰 정치인이 되려면 송영길을 필요 이상으로 난도질하는 이런 식의 입장문에는 다시는 참여하지 않기 바란다. 다음 당 대표 경선에 또 나설텐데, 너무 용렬하고 조악해 보인다.
특히 당의 분열과 갈등을 확대하지 말고, 이를 줄이고 치유하는 데 전에 총리실 시민사회비서관으로서 전설적인 업적을 보였던 그 자세로 헌신(獻身)해 주시라. 당의 힘을 줄이지 말고 늘리는 지도자가 되기를 거듭 당부한다. 이는 친문들의 '정치적 사부'(師父)인 노무현의 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전민동'에 돌아오기 바란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을 기억해야 한다. 대우자동차 노동자 시절의 홍영표를 잊지 말기 바란다. 그것은 인간 홍영표의 영혼이기도 하다.
[김민석 들어보라]
김민석(58)은 50살도 되기 전에 남들은 평생 겪음직한 영욕을 다 맛본 정치인이다.
서울대 총학생회장으로 만 40살에 15대 의원이 됐다. 그 전 14대 총선에서도 4개 부처 장관을 지낸 나웅배에 285표 차로 석패해 지고도 스타가 됐다.
2002년 만 38세에 서울시장 후보가 되었으나 MB에게 패했다. 하여튼 그대로 성장하면 '미래의 대통령감'이라는 데 이의가 없었다.16대까지 3선으로 잘 나가던 그에게 급제동이 걸린 것은 2002년 대선 때 정몽준을 지지하는 오판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 17-20대 16년간 국회에 들어가지 못하고 헤맨 것도 여기에 뿌리했다.
그의 재기 집념은 집요했다. 이혼, 재혼의 불리한 환경을 이겨내면서 생존전략을 계속했다. 필자가 공보수석으로 모셨던 김원기 전 국회의장(17대)을 초대해 "재기를 도와달라"고 읍소하는 현장에 여러 차례 같이 하기도 했다.
2017년 민주연구원장으로 복귀했다. 2020년 21대 대선에서는 예상을 깨고 현역 신경민을 경선에서 밀어내며 12년 만에 본거지인 영등포을 의원으로 돌아왔다.
경선과정에 대해 대부분의 패자들이 그러듯이 신경민도 많이 억울해 한다. 그러나 승부는 끝났고, 뒤집혀지지 않았다.
문제는 '민주주의 4.0'도 아닌 김민석이 왜 송영길 저격에 열심이냐는 것이다. 그는 "하산 신호를 내린 기수가 갑자기 홀로 등산을 선언하는 데서 생기는 당과 국민의 혼선을 정리해 줄 의무가 있다"고 송영길을 공격했다.
그러면서 뜽금없이 서울시장 후보의 '교황 선출식 방안'을 제안했다.
어느 지역에서나 후보 선출은 당헌, 당규대로 하면 된다. '교황 선출식' 운운하는 것은 송영길에게 태클을 걸어보는 것 외에 다른 좋은 뜻이 있는 것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20년 전 자신이 도전했던 서울시장. 김민석은 준비를 철저히 해 자신이 생기면 직접 도전하면 그만이다.
왜 이런저런 뒷담화로 송영길의 등 뒤에서 총을 쏘는가? 매우 구차해 보인다.
김민석은 2005년 선거자금 2억원을 영수증 처리하지 않은 혐의로 징역 8월과 집행유예를 받았다. 2018년에는 7억원 수뢰 혐의로 위기에 몰렸으나 다행히 정치자금은 무죄가 나고 벌금 600만원을 받았다.
이런 연유로 김 의원에게는 '청렴성'에 대한 의심이 따라다닌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남을 칼질 하고 있을 계제가 아니다. 왕년의 '대통령감 영순위' 김민석의 자존심을 다소라도 되찾으려면, 끊임없이 자신을 절차탁마(切磋琢磨)하면서 애민애족의 정신과 정책, 비전이 있는 지도자라는 것을 진심을 다해 전달해야 한다.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
[막 떠들다 갑자기 은퇴하는 최재성, 도깨비인가?]
최재성(57)은 정계 입문부터 갑작스런 은퇴까지 모두 평범하지 않다.
동국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전대협'(全大協) 후기인 그는 뜻밖에도 신한국당(국힘당의 전신)에 공천을 신청했다가 낙방하자 민주당으로 방향을 바꾼 특이한 경력이 있다.
2017년 대선을 치르면서 느꼈지만(최재성, 제1 상황실장. 김기만, 후보 언론멘토) 그는 사람을 끄는 특기(?)가 있다. 39살에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 의 마음을 훔쳐내 17대 국회 공천을 받았다. 문재인 대통령도 그를 신임해 2017년 선대위에서 상황실장을 맡겼다. 21대 총선에서 낙마한 그를 넉달 후인 2020년 8월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불러들여 2년 8개월이나 일하게 했다.
당내 '86그룹'의 중추이기도 한 그는 지난 6일 전격적으로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떠날 때는 말없이"라는 말은 모르는지 그는 7일 언론을 상대로 송영길 전 대표에 대해 악담으로 일갈(一喝)했다.
"송 전 대표의 출마는 민주당에 대한 신뢰의 문제로, 이는 민주당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큰 타격을 주는 '송탐대실'이다". '조어(造語) 능력'까지 발휘했다. '소탐대실'(小貪大失). '송탐대실'.
그보다 전인 3월 21일 역시 "정계 은퇴"를 선언한 또다른 86세대 리더 김영춘은 누구 하나 비판하지 않고 시대의 변화와 자신의 부족함을 탓했다.깔끔했다. 군더더기가 없었다.
"시대가 변했다. 거대담론 시대가 가고 생활정치 시대이다. 잘 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물었다. 아니었다. 정치인 생활을 끝내고, 국민 속으로 돌아가려 한다".
유력한 부산시장 후보이며 전 해수부 장관인 그는 "은퇴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보여주는 듯한 감동을 주었다.
최재성은 이런 점에서 경량급이다. 그렇게 남의 말 할 계제도 아니다. 자신의 약점이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17대 총선에 그를 공천했던 정동영조차 지난 2010년 10월 전당대회 과정에서 "최재성이 신한국당에 입당했던 자인줄 알았으면 절대 공천 안했다. 내가 속았다"고 토로했다.
그는 이미 "20대 총선(2016년) 불출마''를 선언한 바 있다. 그러나 곧 번복했다. 그리고는 자신을 3선으로 키워준 경기 남양주 선거구를 버리고, 2018년 재보선에서 서울 송파에 뛰어들었다. 열심히 밭을 갈고있던 송기호 변호사를 밀어내고, 후보가 되어 4선에 성공했다. 정치는 비정하다. 송 변호사에게는 왠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겠는가?
4선 중진이 된 최재성은 당 대표 경선에 나섰다. 그러나 예선에서 컷오프 되고, 21대 총선에서는 젊은 피 배현진에게 패했다. 청와대 정무수석을 하다 작년 4월 물러난 그는 이번 대선에서 무려 3만 4천표 차의 대패를 당했고, 6일 정계 은퇴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불교학과 출신이라 인생무상을 절감한 것일까? 갈테면 가는 것이지만 왜 하고 많은 말 중에서 송영길만을 저격하고 떠나는 것일까? 제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끌은 잘 보였는지 묻고 싶다. 최재성, 과거가 적지 않게 부담이다. 침묵이 금이다. 그래도 민주당을 사랑한다면 떠나면서 더 이상 당을 분탕질하는 언행은 삼가기 바란다.
[안타까운 사람, 우상호여!]
'민주주의 4.0' 소속이 아니면서 송영길을 맹공해 필자를 놀라게 한 이가 또 있다. 송영길과 같은 연세대 81학번으로, 41년 절친인 우상호(60).
우상호는 '전대협'이 낳은 '스타 중의 스타'이다. 연세대 총학생회장에 '전대협' 부의장이었고, '전대협 동우회장'도 지냈다. 고대 총학생회장 이인영(58. 현 통일부장관)과 손잡고 1987년 6월 항쟁을 잘 이끌었다.
그가 서울 서대문갑에서 16-21대까지 연세대 동문 선배 이성헌(64)과 치른 여섯 번의 '복수혈전'은 그 자체가 국민적 관심사였다. 우상호는 첫 대결인 16대와 18대에서 졌으나 나머지 네 번은 다 이겨 종합전적 4승 2패를 기록했다.
강원도 철원(鐵原) 태생인 그는 역전의 맹장이다. 겉으로는 버드나무처럼 부드러워 보이지만 속에는 강철심이 박혀 있다. 2016년 원내대표 경선에서는 강창일 노웅래 우원식 민병두 이상민 같은 쟁쟁한 후보들을 모두 꺾고 승리했다. 그의 승리를 예상한 기자는 없었다. 우상호 원내대표는 '탄핵의 강'을 잘 건너는 데도 지도력을 발휘했다.
이번 대선에서 이재명 후보 '언론고문 겸 언론멘토단장'을 맡았던 필자는 3.9 선거를 딱 40일 남겨놓은 1월 27일 '선대위 총괄선대본부장'으로 긴급 투입된 우상호와 긴밀히 협력해야 했다.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일을 참 잘 했다. 정말 스마트했다. 그가 오고난 뒤부터 선대위가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19대 대선 때 공동선대위원장을 맡았던 경험의 축적과 지혜는 고비마다 큰 힘을 발휘했다.
그런 그가 송영길을 공격하는 모습에 충격받았다. "대선의 패장이 서울시장에 나가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우상호의 말에 쓰러질 뻔 했다. 우상호 맞아? 왜 저럴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당에서 부동산 문제로 해당 의원들에게 출당(出黨)을 요구했을 때 당초 그 명단에 있었던 우상호(무혐의로 밝혀짐)가 크게 섭섭했었나?
지금도 궁금하기 짝이 없다. 전화하고 싶은 걸 꾹 참고 있다 필시 무슨 까닭이 있겠지?ᆢ
물론 우상호도 지금 내상(內傷)이 적지 않다.
작년 4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도전하면서 "22대 총선 불출마"라는 배수진을 쳤다. 그러나 실패했다.
'닥치고 부동산'으로 올해 상황은 더 어려워졌다고 판단해 서울시장 출마는 사실상 접었다.
그런데 송영길이 출마 결심을 밝혔다. 수용이 힘들었을까? 그래서 공격한다? 아닐 것이다. 선거 패배 책임을 묻는다면 총괄 선대본부장은 결코 면피되지 않는다. 더 큰 책임을 느껴야 한다.
더욱이 3.9 대선에서 우상호의 서대문갑은 상당한 차이로 패했다. 총괄 선대본부장으로서 부담이 될 수 있다. 그런데도 41년 동지의 결심을 격려, 축하해 주지 않고 오히려 저렇게 눈물을 재촉한다? 이해하기 어렵다.
우상호를 아끼기에, 그의 입에서 험한 얘기가 나올까 걱정되어서 하지 않고 아껴둔 전화를 오늘은 해볼 생각이다.
['민주주의 4.0'에 묻는다]
송영길은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즉각 사퇴했다. 송 지도부의 사퇴를 요구한 것은 잘 알다시피
주로 이낙연 계다. 이들은 송 전 대표를 밀어내고 이낙연을 비대위원장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어떤 면에서 현 '윤호중 비대위'는 '이낙연 비대위'를 피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보는 견해도 적지 않다.
홍영표는 환경변화가 없다면 아마도 차기 당 대표 경선에 출마할 것이다. 출마는 자유지만 그가 이재명 상임고문과 경쟁하는 건 현 상황에서는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 될 것이다. 그가 당 대표가 될 수 있는 길은 단 한가지, 이재명 고문의 불출마 뿐이다.
이런 추론이 가능하다. 송 전 대표의 출마를 반대하는 것과 같은 명분으로 이재명 고문의 당 대표 출마를 반대한다. "대선 패배의 가장 큰 책임은 대선 후보에게 있다"고 몰아붙인다. "당 대표가 대선 패배의 책임을 지고 불출마해야 한다면, 당연히 대선 후보도 불출마해야 한다"는 논리를 편다.
"이재명 고문의 보궐 선거와 당 대표 출마는 명분도 가치도 없는 내로남불식 출마"라고 저 입장문처럼 몰아간다. 이재명 고문이 불출마하면 홍영표가 당 대표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낙연 계는 이재명 고문의 당 대표 출마를 저지하기 위해 송영길을 때리는 것이다. 이를 '성동격서(聲東擊西) 전략'이라고 한다. 동쪽에서 소리를 내고 서쪽을 친다. 교묘하게 상대를 속여 공략하는 전략이다. 고대 중국 병법인 '삼십육계비본병법'(三十六計秘本兵法)의 6번 째 계략이다.
TV에 패널로 나오면 아군인지 적군인지 구분할 수 없는 얘기를 자주 해 가슴이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5선의 이상민 의원. 아예 "이재명 고문이 좀 뒤에 물러서서 쉬어야 된다"고 조언하는 그는 "조급증을 내서 곧바로 당 대표에 도전하거나 지방선거에 영향력을 미쳐 세력을 구축하려고 하면 낭패를 볼 것"이라고
저격한다.
그는 7일에도 TV에 나와 "송영길을 우연히 만났는데, 불출마를 권유했다"고 자랑하듯 말했다. 명색 5선인데 사고의 수준은 초재선에도 미치지 못해 보인다. 누구를 탓하랴. 민주당의 민낯이다.
송 전 대표가 "22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을 때, 단 한 명의 의원도 따라나서지 않아 송 전 대표와 민주당 지지자들을 무안하게 만들었던 그 5선들 중 하나인 전 대선 선거관리위원장의 모습이다.
이들의 목표는 송영길이 아닌 듯하다.이재명으로 보인다.
더 상세히 말하기도 싫지만 굳이 대선 패배의 원인을 따질 때, 이낙연 계는 결코 자유롭지 않다.
"괴물보다 식물이 낫다"는 망언(妄言)을 남기고 적장(敵將) 尹에게 안긴 NY 캠프 공보실장 정운현, NY캠프 복지비전위원장으로 일했고 경선이 끝나고도 한동안 JM 등에 계속 비수를 꽂다가 탈당해 버린 이상이 제주대 교수.
선거 12일 전까지도 "이재명을 보면 감옥에 있는 MB가 생각난다"고 저주의 극언을 거듭하다 2월 24일 갑자기 큰 깨달음이 온 것처럼 "이재명이 많이 억울했겠더라,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눙친 설훈. '선대위 공보단장'이라는 막중한 직책을 110일간 수행하면서 누가 봐도 태업(怠業), 심지어는 '적극적 사보타지'(sabotage)를 한 박광온.
그리고 무엇보다 "대장동 몸통은 이재명이다"라고 처음 세상에 외쳤던 경기경제신문 작년 8월 31일자 <화천대유 자산관리는 누구 것입니까>라는 박종명 기자 칼럼에 결정적인 제보를 해 주었다는 NY의 측근 핵심.
그 칼럼이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대장동 의혹 언론보도는 나름 의문이 있어 보도하는 것", "이재명은 여러 위험부담, 리스크가 있다", "대장동 의혹은 비상식적이다"라고 동료 경쟁 후보를 잔인하게 몰아붙여 결과적으로 '국힘당 대장동 총공세'의 물꼬를 터 준 이낙연 후보.
이런데도 NY 측이 "패배의 책임이 없다", "최선을 다 했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필자는 지난 1월 22일, 서울대 학생회장 때부터 아껴온 후배인 서울 은평을 강병원 의원의 "대선 필승 결의대회'(은평문화예술회관)에 참석했다. 이날의 초청 연사는 이낙연 전 대표였다.
이날 본 행사가 끝난 뒤 이 전 대표는 그의 팬클럽 수십 명에 둘러싸였다. 이 때 눈을 의심케 하는 광경이 벌어졌다. 물론 이 전 대표가 '선대위 상임 총괄선대위원장'을 맡기(2월 7일) 전이긴 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이재명 후보를 돕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 앞에서 "그동안 저를 도와주었듯이 이제부터는 이재명 후보를 도와달라"고 한 마디는 하리라 기대했다.없었다.
"강물은 포기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플래카드를 중심으로 단체 사진을 찍더니 잠시 후 모든 참석자와 한 명씩 일일이 따로 사진 찍어주고, 사인까지 다 해주고서야 행사를 끝냈다. 사진 찍고 사인 해주는 사이 간간이 "이낙연", "대통령"이라는 구호도 들렸다.
필승대회가 끝난 후 자신의 지지자들 앞에 선 이낙연은 거듭 말하지만 이재명의 '이'자도, 후보의 'ㅎ'자도 꺼내지 않았다. 이 모든 과정이 필자의 휴대폰 카메라에 담겨있다. 원하면 공개한다.
이낙연은 필자의 동아일보 1기 선배이다. 1981년 필자가 동아일보에 입사한 후 지금까지 41년간 이 선배를 지켜봤다. "모르는 게 없다"고 해도 좋을만큼 그를 상세히 안다.
"모든 위인(偉人)은 내실(內室)과 외실(外室)이 따로 있다"는 말이 있을만큼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중적이고 약점 투성이이다. 이낙연도 당연히 그렇다. 그동안 말을 아껴왔다. 동아일보 선배이고 이재명 후보의 총괄 상임선대위원장이었던 그를 보호해주고 싶었다.
이런 필자의 태도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 인내심에 한계를 느낀다.
첫번째는 박광온의 원내대표 출마 때문이었다.
필자와 박광온은 같은 호남 출신 언론인인데다, 2012년 18대 대선 때 문재인 후보의 언론특보를 같이 한 동지 관계이다. 박광온을 아꼈다.
그가 8남매의 막내로 조실부모해 어렵게 성장한 '의지의 사람'이며, 윤영규 전 전교조 위원장이 존경하는 고교시절(광주상고) 은사라는 것까지 안다. 근본이 좋은 착한 후배였다.
그러나 사(私)는 사고, 공(公)은 공이다. 필자는 '선대위 공보단장'으로서 박광온의 태업(怠業), 적극적 사보타지를 용인할 수 없음을 박광온에게 통보한 뒤 "원내대표 출마를 스스로 포기하라"고 요청했다.
'공개장'을 써 민주당 의원 172명 전원에게 돌렸고, 민주당 권리당원 등 요로와 대형 단톡방에 모두 올렸다. 그래도 출마를 강행하기에 "그렇다면 이제부터 부득이하게 그대의 주군(主君)인 NY에 대해 쓸 수밖에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는 사이 원내대표 선거는 끝났고, 박광온은 졌다. 그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대선 기간중에 골프장 다닌 것이나 동료의원 문상을 열심히 다니며 원내대표 선거운동을 한 것도 다 귀에 들어왔다. 그의 '정치적 말로'(末路)를 보는것 같아 그 발버둥이 가여웠다
필자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두번째 사안은 민주당 내부 싸움질이었다. 필자는 지난 4월 2일자 <민주당, 1970년의 'YS, DJ 동지정신'으로 돌아가자>라는 호소문에서 "강철같은 당의 단합"과 함께 정세균, 이낙연, 이재명에게 '계파 해체'를 주문한 바 있다.
물론 '마이동풍'(馬耳東風)이었고, 당의 내분(內紛)은 점차 격화됐다. 석고대죄 해도 부족하다고 생각해온 NY계가 오히려 당권을 욕심내고, 서울시 지역구의 일부 국회의원과 '민주주의 4.0'을 비롯해 영향력이 적지 않은 몇몇 의원들이 "당을 구해보겠다"며 "독배(毒盃)를 들겠다"고 나선 송영길을 '집단 따돌림'(이지메,
いじめ)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고 결심했다.
이것이 진정 금도(襟度)를 중시하는 이들의 언행(言行)이란 말인가? 같은 당의 후보가, 동료가 맞는가? 특히 나중에 총괄 상임선대위원장이 되는 NY가 취할 최선의 처사였는가를 엄중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삼고초려 하면 출마를 검토할 수 있다"는 오만하고 반성 없는 '언어 조합'은 이 전 대표의 작품인가 아니면 그 측근의 '언어 희롱'인가?
'민주주의 4.0"이여. 그대들이 '입장문'에서 쓴 '후안무치'나 '언어도단' 같은 단어를 쓰려면 바로 이럴 때라야 아귀가 맞는 것이다.
민주당은 중차대한 기로에 서 있다. 당권과 자리에 먼저 눈이 가 있는 세력이 혹여 다시 당을 장악하면 '개딸'과 열성당원들의 헌신, 민주당의 혁신은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도로 고구마당'이 될 것이다. 이재명 고문도, 문재인 대통령도 조국 일가처럼 '적폐 카르텔'의 먹이감이 될 것이다.
'민주주의 4.0'과 NY계 인사들 및 일부 당권에 눈이 멀어 당의 단합과 화해, 그리고 동지애와 담쌓은 분들에게 분명하게 말한다.
민주당이 지금처럼 '콩깎지로 콩볶기' 하듯 골육상쟁(骨肉相爭)을 계속한다면, 이재명도 문 대통령도 지켜내지 못한다.
취임이 한 달 이상 남았는데 벌써부터 '김혜경 법인카드' 수사로 옥죄기 시작한다. 尹의 충직한 사냥 꾼 한동훈의 서울 중앙지검장, 혹은 수원지검장 설을 퍼뜨리며
겁주기에 들어간다. 휴대폰 포렌식도 안된 한동훈 사건은 서둘러 무혐의 종료되고, "탈원전(脫原電)을 주도했다"며 산자부에 압수수색이 들어간다.
우려하고 걱정했던 상황이 취임 훨씬 전부터 전개되고 있다. '검찰공화국 사냥견'들의 음습한 저 준동을 느끼지 못하는가? 통곡하는 심정으로 묻는다.
그래도 콩깎지로 콩볶기하는 비극을 계속할 것인가?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으로 면면히 이어져 온 민주당이다. 민주주의와 민주당을 지키기 위해 다섯 차례 죽을 고비를 돌파하신 김대중 님의 영혼이 여의도 민주당사를 굽어보고 계시다. 노무현 님의 부엉이 바위가 눈을 부릅뜨고 172명의 의원을 응시한다.
이 엄중한 상황에서 정신 못차리고 "제 살 깎아먹기'나 하며 세월을 농할 수는 결코 없다. 역사와 국민 앞에 "신 오적'(五賊)이 되어서도 안된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단결이다.
반성하자. 겸허하자. 서로를 아끼자. 국민을 섬기고 두려워하자. 하나로 똘똘 뭉쳐 위기를 밀쳐내고, 민주당을 살려내자. 문재인, 이재명을 지켜내자!
김기만. 전 동아일보 파리특파원, 노조위원장/ 청와대 춘추관장 (김대중 정부)/국회의장 공보수석, 초대 게임위원장(노무현 정부)/한국방송광진흥공사 사장(문재인 정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