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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기술자' 이근안에 희생된 '民靑聯 천재' 이을호(李乙鎬) 묘비제막식:가디언21

'고문기술자' 이근안에 희생된 '民靑聯 천재' 이을호(李乙鎬) 묘비제막식

가디언21 | 기사입력 2022/04/06 [16:28]

'고문기술자' 이근안에 희생된 '民靑聯 천재' 이을호(李乙鎬) 묘비제막식

가디언21 | 입력 : 2022/04/06 [16:28]

1985년 9월.

만 서른의 이을호(李乙鎬. 1955-2022)  '민청련'(民靑聯) 상임위 부의장이 악명 높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이근안(李根安) 일당에게 23일에 걸쳐 수십번의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합니다. 민청련 김근태 의장과 함께였습니다.

 

6월 3일 석방되었을 때 이들 둘의 영육(靈肉)은 이미 극단 파편화, 생체해부 상태였습니다.

 

이을호는 후에 이렇게 술회합니다.

<잠 안재우고, 물고문 며칠 하면 변이 안나온다. 전기고문과 칠성판이 더해지면 '내가 올빼미'라는 환상이 든다. 죽고 싶다는 것 외에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된다>

 

이 천인공노할,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잔혹무비한 고문 이후, 이을호는 정상적인 생활이 힘들 만큼의 정신적 문제를 안게 됩니다.

 

한국정치의 한 축을 맡아 양심과 정의를 앞세우고도 나름대로 정치세력을 넓혀가던 '따뜻한 민주주의자' GT는 26년 후인 2011.12.30 별세했습니다.  그 10년 여 후인 올 1월 26일 이을호가 36년의 고통 끝에 고문후유증에 따른 복합증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늘 오후 마석 공원묘원 '민주화운동 열사 묘역'에서 이을호 님 '묘비 제막식'이 있었습니다.

 

민청련 동지들, 서울대 친구들, 고교(전주고 51회)  동기동창들, 전민동(전북 민주화동우회) 선후배 등 100 여 명이 '청명'(淸明) 오후 아름다운 봄날에 이을호 묘소 앞에 섰습니다. 진행된 대로 옮겨봅니다.

 

1. 수많은 애국지사, 민주화 투사, 노동열사 등이 묻혀있는 이 성지(聖地)에 이을호도 또아리를 틀었습니다(사진 1-3).

 

 

 


2. 고인의 아내 최정순 서울시 의원이 인사말을 합니다

 

<이을호는 외롭지 않다는 것을 오늘도 절감한다. 요즘  자주 운다. 집에 가면 '아이 러브 유' 하며 그가 나올 것 같은데, 없다. 좋은 일만 생각나고, 나쁜 일은 다 잊어지더라. "생육(生育)하라, 번성하라, 땅을 정복하라"는 그의 사실상 유언을 잘 따라야 하겠다고 다짐한다. 특히 그가 좋아했던 여러 독서회를 잘 끌어가보고 싶다"(사진 4).

 


3. 이어 대학 동기 친구 김사인(시인)이 추모글을 올렸고(사진 5), 제례(祭禮)가 이어졌습니다.

여러 사람이 참여한 가운데 묘비가 세상에 모습을 선보였습니다. '이을호" 앞면 글씨는 민청련 오랜 동지인 이기연 님이 썼습니다(사진 6). 뒷 면 글은 김사인 시인 작품이고요(사진 7).

 

<우리의 오랜 자랑이여/ 우리의 오랜 상처여/남겨진 우리의 길고 긴 슬픔이여/역병에 제 몸 내주어/마침내 한 시대의 상징을 이루었구나/이을호!>

김사인 씀.

 

 


4. 고인을 회억(回憶)하는 민청련, 전민동, 대학, 고교 친구들의 헌사(獻辭)가 이어졌고, 그냥 헤어지기 아쉬운 이들은 뒤풀이까지 같이 했습니다. 

 

'청명' 좋은 절기에, 69일 전에 인생 소풍을 끝내고 '고문 없는 하늘나라'로 주소를 옮긴 '시대의 비극적 천재', 자타 공인 전주고 30년래의 최고 천재 이을호를 저마다 가슴에 품고 마석 공원묘원을 떠났습니다.

 

고인의 2년 선배. 고전독서회(CRC), 전민동 선배, 김기만(사진 8) 씀.

 


* 묘역에 있는 김근태, 곽태영(안두희 응징), 노회찬 이창기(언론인) 김국태(소설가)님의 묘소(사진 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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