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덕수론(論). 불가론(不可論).

가디언21 | 기사입력 2022/04/03 [11:53]

한덕수론(論). 불가론(不可論).

가디언21 | 입력 : 2022/04/03 [11:53]

<고향을 숨기고  부인하고/5명 대통령 밑에서 온갖 영화 누린/자신을 국무총리에 발탁한 노무현대통령을 배신,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않은/MB 박근혜와 손잡고 등달(騰達)을 계속한 그가 또 총리?ᆢ>

 

- '가명인(假明人) 두상(頭上)에 일봉(一棒)'의 심정으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As good As It Gets).

 

1997년 제작되어 1998년 

아카데미상 남녀주연상을 휩쓸었던 전형적인 로코(로맨스 코미디) 명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번역된 제목이 원제(原題)를 뛰어넘을 만큼 좋았다. 

1998년 국내 개봉에서도 당시로는 성공적인 50만 명 관객을 불러온 데는 제목의 힘도 컸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 오하라(비비안 리 분)의 마지막 대사 <Tomorrow is another day>를 "내일은 또 다른 날"이라고 번역했으면 별 감동이 없었을 것이다. 이걸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고 기막히게 번역해 놓으니, '역사적 명대사'가 되고,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膾炙)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한덕수(韓悳洙.73). 이 분의 이력서를 펼쳐놓으면, 딱 그 말이 떠오른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그 누구도 이보다 화려할 수는 결코 없다.

 

그렇다. 그가 5명의 대통령을 거치며 일했던 열거하기도 힘들만큼의 최고위 관직을 적다 보면 입을 다물지 못할 놀라움과 함께 "뭐 이런 '변신술의 귀재'가 다 있어!"라는 의구심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더욱이 그는 과거 우리나라를 좌지우지했던 영남 출신도 아니다. 고향이  전북 전주다. 거듭 놀랄 수밖에 없다.

 

경기고, 서울상대 경제학과, 하버드대 경제학 석박사. 8회 행시(行試) 최연소(21) 합격, 서울상대 수석 졸업. 

 

경제기획원, 상공부에서 이력을 쌓은 후 1996년 김영삼 정부 특허청장으로 고위관료를 시작했다.

 

 이어 통상산업부 차관,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대사,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이상 김대중 정부).

 

산업연구원장, 총리실 국무조정실장,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 국무총리 권한대행, 한미 FTA(자유무역협정)체결 지원위원장, 38대 국무총리(이상 노무현 정부).

 

주미 대사(이명박 정부). 한국무역협회 회장, 기후변화센터 이사장(박근혜 정부). 5명의 대통령과 함께 쉼없이 최고위직에서 일했다. 그러고도 지금 73세다. 고속출세를 거듭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문재인 정부에서만 기용되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통 관료 중에서 한덕수만큼 국록(國祿)을 굵게 먹은 사람은  없다.  '경제기획원(EPB) 사무관'으로 시작해 2017년 '기후변화센터 이사장'으로 공직을 마칠 때까지 40년 이상 국록을 받았다. 박정희부터 박근혜까지다.

 

사무관으로 시작해 '1인지하, 만인지상'인 재상(宰相)까지 올랐다. 특히 주로 상공부에서 일한 경력으로 OECD 대사와 주미 대사라는 영광까지 안았다. 그저 경탄할 뿐이다.

 

그런데, 왜일까? 한덕수를 생각하면 무슨 영문인지 일제강점기의 대문장가 애류(崖溜) 권덕규(權悳奎) 선생의 <가명인 두상 일봉>(假明人 頭上  一棒)이라는 통쾌한 명문장이 떠오른다.

 

 이 논설은 1920년 4월 동아일보 창간 한 달 후에 실렸는데, 결국 박영효 초대 사장의 퇴임을 불러왔다. 

 

이 논설에서 권덕규 선생은 "아, 슬프고 원통하다"고  하면 될 것을 굳이 "오호통재"(嗚呼痛哉)라고 써야 직성이 풀리는 일부 주자학파 유학자들을 '지나(차이나) 사상의 노예'라고 통박했다. 

 

그러면서 한족(중국)문화를 빛내는데 몰두하는 저들을 '가짜 명나라 사람들'이라고 부른 뒤 "그들의 머리에 몽둥이를 한 방"이라고 저격했다. 

명나라에 기울어진 일부 유학자들에게 한국인의 정체성을 되찾아 주체적인 학문을 하라는 꾸짖는 격문(檄文)이었다.

 

한덕수와 인연이 많다. 고향(전주)이 같고, 동아일보 기자시절 내내 취재원으로 만났으며, 김대중 대통령님 시절에는 '청와대 경제수석'과 '춘추관장'으로 같이 일했다. 노무현 대통령님 시절, 그가 국무총리에 오르자 초대 게임위원장이었던 필자는 크게 축하했다.

 

이제부터 인간 한덕수를 말해주는 몇가지 추억을 소환해보려 한다. 우선 전제가 있다. 필자는 그의 실력과 능력에 대해서는 이의(異議)가 없다. 슬하에 자녀도 없이 "일이 취미"라고 할만큼 일중독인 것도 좋게 본다.

 

다만 지금부터 쓰는 몇 장면은 필자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이 시대 최고의 관료 한덕수의 인간성, 됨됨이에 대한 필자의 주관적 견해와 분석이다. 이 점 고려해주기 바란다. 좀 비판적일 것이다. 사람 됨됨이에 대한 평가처럼 어려운 일도 드물다.

 

* 장면 1.

1995년 일이다. 초대 민선 전북지사로 29, 30대 전북지사인 유종근 박사(전 아태재단 사무총장)는 취임 이후 '전북경제 살리기'를 강조했다. 중앙정부의 지원이 절실했다.

 

중앙부처 요직에 전북 출신이 누가 있는지 찾아보던 중 상공부 국장 한덕수를 발견했다. 즉시 한 국장을 방문, "전북경제가  많이 어려우니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이런 대답을 들었다. "나는 전북 출신 아니니 앞으로 절대 나를 찾아오지 마시오".

미국 뉴욕주립대 경제학 박사에 럿거스대 교수를 했고, 한덕수보다 5살 많은 유 전 지사가 일생 이 냉대와 수모를 잊을 수 있을까?

 

* 장면 2.

1996년 12월 그가 특허청장에 임명됐다. YS 정권 말기였고, 호남 출신 장차관이 아주 적었던 때였다.

 

그를 개인적으로 잘 아는 전북 출신 기자들이 그의 출신지를  '전북'으로 썼다. 그러자 그는 해당 언론사에 일일히 연락해 자신의 본적이 '서울'임을 밝혔다.(그는 3남이기 때문에 결혼해 분가하면 본적이 바뀜).

 

이렇게 되면 언론사는 다음에 실수하지 않기 위해 한덕수 인사카드의 '본적'란을 '서울'로 정정해 놓는다. 

 

그가 특허청장에 가기 전 상공부 마지막 보직이 산업정책국장이었다. 고향이 어딘지 뻔히 아는 기자들이 넌저시 '전주'를 언급해도    그는 눈하나 꿈쩍 않고 부인했다. 답을 안하는 것과 부인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는 전주가 고향임을 부인했다.

 

*  장면 3.

김대중 정부 출발점이던 1998년 3월 그는 통상산업부 차관에서 일약 초대 통상교섭본부장으로 발탁되었다. 언론사는 1년 여 전의 경험이 있어 그의 본적을 '서울'로 썼다. 그러자 이번에는 한 본부장이 각 언론사에 팩스를 보냈다. <전주가 고향이며, 초등학교 일부도 전주에서 다닌 전북 출신>이라는 요지였다. 김대중 정부이니 호남 출신임을 밝히는 것이라 이해하고 싶어도, 그 팩스를 보는 순간 동향 후배로서 참담한 심정이 됐다. '가명인'(假明人)이라는 말이 머리에 맴돌았다. 그를 보는 전북 출신 기자들의 눈초리가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 장면 4.

2002년 6월2일. 한일 공동주최 월드컵 한국의 첫 경기 폴란드 전이 부산에서 열렸다. 대통령님 부부, 청와대 비서진, 출입기자 등 약 80명의 대부대가 내려갔다. 2대 0. 월드컵 역사상 한국이 첫 승리를 거두었다(사진 참조).

 

숙소인 인터불고호텔로 돌아오는 길은 감동 그 자체였다. 시민들은 "대한민국", "김대중"을 연호했다. 대통령님은 1호차를 애워싸는 시민들과 악수하고 포옹하기 위해 수십번을 연도에 내리셨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면서 울음이 났다. 사실 집권 직후부터 '동진(東進)정책'을 추진하며 '동서(東西)화합'을 위해 무던히도 노력해 왔지만 대구, 부산을 갈 때마다 대통령님에 대한 시민들의 냉대 때문에 참모진은 좌불안석이었다. 

 

집권 초 대통령님이 

대구를 방문했을 때, TK 세력은 신현확(전 총리), 김준성(전 경제부총리)을 내세워 수뢰죄로 수감중이던 김만제 전 포철(浦鐵)

회장(전 경제부총리) 석방과 섬유산업 대폭 지원 등을 요청했다.다 들어주었다. 김만제를 풀어주었고, '밀라노 프로젝트'라고 명명해 대구 섬유산업을 적극 지원했다. 대통령님 유럽 순방 때 문희갑 대구시장이 수행해 밀라노를 같이 방문토록 배려했다. 그러나 그 뿐. 대구, 부산 민심은 집권 말기에 이를 때까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던 판에 부산에서 연도 시민들의 "대한민국" "김대중" 연호를 들으니 대통령님이 상기되는 것도 당연했다. 물론 시민들이 갑자기 대통령님을 좋아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2202년 월드컵 한국의 첫  경기에서 거둔 월드컵 사상 첫 승리가 사람들의 가슴속에 있던 얼음을 녹여버린 터였다.

 

숙소로 돌아오신 대통령님은 청와대 출입기자를 관장하는 춘추관장인 필자를 불러 "오늘 저녁에 출입기자단, 청와대 비서진 모두 맘놓고 한번 마셔라"라며 "비용은 경제수석에게 말해놨다"고 하셨다. 경제수석은 바로 한덕수였다. 

 

잠시 후 경제수석 방에 갔다. 익히 아는 사이이고, 대통령님 말씀이 있었다 하니 그냥 좀 서있었다. 한 수석은 봉투 하나를 건냈다. 세어보니 200만원이었다. 아니? 100명 가까운 인원에, 대통령님이 맘놓고 마시라고 했는데,

200만원?ᆢ

필자는 봉투를 책상 위에 그대로 놔두고 나오면서 한마디 했다. "늘공은 영혼이  없다더니. 수석님이나 잘 드세요. 기자단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그 뒤 여러번 봤지만 봉투사건에 관해서는 말한번 섞지 않았다.

 

*  장면 5.

한덕수는 노무현 정부에서 최전성기를 맞는다. 첫번 째로 2003년 3월 산업연구원장을 맡더니 1년 만에 총리실 국무조정실장에 임명됐다. 또 1년 후에는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이 되었고, 2006년 3월 당시 이해찬 국무총리가 '3.1절 골프사건'으로 퇴임하자 '총리 권한대행'을 맡았다. 벼슬복은 타고났다.

 

그는 2006년 8월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체결 지원위원장으로 한숨 고르는가 싶더니, 2007년 4월 드디어 제 38대 국무총리에 오른다. 노무현 정부 마지막 총리였다. 욱일승천(旭日昇天)하는 그를 보며 "도대체 어떤 점이 특별히 뛰어나서 그렇게 까다로운 DJ, 노무현 대통령님으로부터 저렇게 신임을 받을까" 하는 경탄과 의구심이 오갔다.

 

* 장면 6.

필자가 한덕수의 <이보다 더 화려할 수 없다>고 하는 이력에서 가장 놀라는 순간이 이것이다. 2009년 2월,  외교 경험이라면  2000년 12월부터 1년간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대사가 전부인 그를 MB가 주미 대사에 기용한 것이다. 

 

미국정치에 'ABC'라는 단어가 유행한 적이 있다. 클린턴에 이어 대통령에 오른 아들 부시는 클린턴이 했던 정책은 다 폐기하고 무조건 거꾸로 갔다. 그래서 <클린턴이 아니라면 무엇이든지 좋다>라는 뜻의 'ABC'(Anything    But Clinton)가 유행했다. 후임자가 전임자의 그림자를 지우려 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하다. 

 

특히 MB 정부는 노무현 정부와는 결 자체가 완전히 다른 보수우익 정권이었다. 그래서 'ABN(Anything But Noh) 정책'으로 가리라는 건 불을 보듯 뻔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MB는 TV 드라마에서 자신을 연기했던 배우 유인촌에게 문화부장관을 맡겼고, 그는 전 정권의 요직들을 몰아내는 칼잡이 역을 조자룡 헌칼 쓰듯 수행했다. 그야말로 우악스럽게 주요 기관장들을 쫓아냈다. 

 

정연주 KBS 사장, 황지우 한예종 총장(장관급), 김정헌 문화예술위원장, 김윤수 국립현대미술관장 등이 유인촌의 협박, 공갈, 유치한 감사(監査)에 몰려 말도 안되는 이유로 옷을 벗었다. 당시 초대 게임위원장(차관급)으로 봉직하던 필자도 예산 배정을 안해주는 등 '고사(枯死)작전'까지 동원하는 유인촌과 싸우다 임기를 남기고 강제 퇴임해야 했다.

 

심지어 MB 정부는 장차관, 공기업 대표, 언론사 임원, 대사 출신 등에게 주어지는 '정부 초빙교수'까지도 철저히 통제, 관리했다. 노무현 정부에서 문화부장관을 지낸 J, K씨 등이 정부 초빙교수에 응모했다 탈락하자 그 뒤로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차관 이상을 했던 분들은 아예 정부 초빙교수 응모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덕수는 누가 봐도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때 가장 영달했던 사람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MB의 눈을 사로잡고 그것도 주미 대사라는 요직을 거머쥘 수 있었을까? 나중에 MB가 회고록을 쓰면 언급하겠지만 여하튼 경탄하고 놀랄만한 생존능력, 변신력임에 분명하다. 

 

*  장면 7.

2009년 5월23일 노무현 대통령님이 돌연 목숨을 끊었다.

 

수많은 얘깃거리가 나돌았다. 그러나 당시 필자의 관심을 끈 건 따로 있었다. 주미 대사에 부임한 지 석달인 한덕수가 장례식에 나타나느냐는 것이었다. 필자는 오리라는 데 걸었다. 노무현 대통령 밑에서 요직을 여섯번이나 맡았다. 무엇보다 마지막 총리였다. 23일 서거 후 29일 국민장이 끝날 때까지 한덕수는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대사를 두 차례  한 친구에게 물었다. "주미 대사 취임 후 석달인지라 자리 뜨기가 어려운 거냐"? 

답은"NO"였다. 본인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다녀갈 수 있으며, 고 노대통령님의 마지막 총리였기 때문에 아무리 MB 정부였다고 해도 건의하면 주미 한국대사의 문상 참여는 100%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얼음덩이처럼 냉정, 냉혹해야 온갖 정권을 이어가며 실력발휘를 할 수 있나보다. '연작 안지 홍곡지지'(燕雀安知 鴻鵠之志)리요.  "제비나 참새가 어찌 기러기나 고니의 큰 뜻을 알리요!"

 

* 장면 8.

만 3년의 주미 대사를 마치고 돌아온 한덕수는 며칠 쉬지도 않고 2012년 2월 한국무역협회장에 취임한다. 

 

무역협회장은 무역인들을 대표하는 자리이지만, 역대 정권에서 한결같이 정부가 OK 사인을 줘야 회장이 결정되는 구조였다. 한덕수 회장 앞의 무역협회장이 사공일(전 재경부장관), 이희범 (전 산자부장관)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MB정권 말기에  무역협회장에 취임한 그는 2013년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뒤로도 끄덕없이 임기 3년을 다 채운 뒤 2015년 2월 퇴임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박근혜 정권은 2015년 12월 한덕수에게 제 3대 기후변화센터 이사장 자리를 준다.

2년을 더 봉직하고 그는 화려찬란했던 공직에 마침표를 찍는다.

 

*  장면 9.

시간이 훌쩍 흘러 2022년 3월말.  인수위가 총리 인선작업에 들어갔음을 밝힌 가운데, 언론에서는 유력 총리 후보를 연일 소개한다. 그런데, 엇! 한덕수라는 이름이 선두에 나선다. 아니 그가 또 거명된다고? 이제 아예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조차 든다.

 

그러고 보니 그는 이미 착실하게 정지(整地)작업을 해왔다. 최근 그가 언론 회견 등을 통해 세상에 내놓은 말들을 유심히 살펴보니, 대통령 당선자에게 "나 여기 있소"라고 자신의 '존재이유'(Raison d'être)를 밝히는 '손짓"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대통령은 포퓰리즘 정책을 최대한 억제하도록 국민과  정치권을 설득하는 임무를 가진 '최후의 보루'이다. 표를 얻기 위해 중장기적으로 가능하지도 않은 정책들이 선거기간 쏟아져 나온 만큼 이 문제를 잘 정리하는게 필요하다>.

 

 <언론을 통해 포퓰리즘 문제 해결 등 당선인에게 바라는 점을 밝힌 것은 전체적인 나의 생각이다. 한국경제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으려면 재정상황을 고려하는 지속가능한 정책을 펼쳐가야 한다>.

 

<불러주면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계속 공부해왔다. 건강에는 문제 없다>.

 

이 정도면 '출사표'(出師表) 아닌가? 총리 지명자의 정책기조 설명같기도 하다. 영어 단어에 'beckon'이라는 게 있다. '누군가를 향해 손짓한다'는 뜻이다. 천하의 한덕수는 지금 당선자를 향해 beckon하고 있다.

 

과연 한덕수의 이  "자신만만한 손짓하기'가 또 통하면서 해방 후 세 번째(김종필, 고건에 이어)로 총리 2관왕이 탄생할 것인가? 

 

한덕수는 전주초등을 다니다 가족이 서울로 이사하면서 서울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뛰어난 테크노크랏이지만 친화력이 좋다거나, 지인이 많다거나, 통이 크거나 하는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 기자들에게 좀 알려진 그의 가까운 지인 중 H씨(81)가 있다. 나이는 한덕수보다 8살  많지만 행시 7회로 1기 차이이며, 고향이 같이 전북이다. 

 

1970년, 21살 때 행시에 붙은 한덕수가  하버드대에서 석박사를 마치고 1979년 경제기획원 사무관(남덕우 부총리 수행비서)으로 갔을 때 고향선배 H씨는 같은 EPB에 법무과장으로 있었다.

둘은 몇해 후 서석준 상공부장관(1983년 버마 아웅산 테러로 사망)이 "상공부를 혁신하겠다"며 인재를 불러모았을 때 같이 상공부에 발탁됐다. 이어 나란히 관료로서 성장해간 둘 중 단연 두각을 나타낸 것은 한덕수였다.

 

김대중 정부 때 초대  통상교섭본부장을 한덕수가 맡았고, 그 후임을 선배인 H씨가 어어받으면서 두 고향 선후배의 사귐은 좀 더 깊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H씨의 주목할 증언을 보자. 1979년 EPB에서 처음 만난 후 40년 이상을 사귀었는데, 한덕수 입에서 고향, 전주에 관한 얘기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 말을 안꺼내니 묻기도 그래서 동향끼리 전주 얘기 한번 섞지 않고 지내왔다나!  참으로 지독하지 않은가?

 

한덕수 일가가 서울로 이사할 때 실은 모친이 하던 사업이 망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모친 회사의 비서실장이 돈을 횡령하고 일가족을 배신하는 일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가가 그 뒤로 고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간접적 이유로 유추해 볼 수는 있겠다. 

 

한덕수 위에 형이 둘 있는데, 포스코 임원까지 한 열살 터울의 큰 형은 필자의 전주북중 선배이다. 전주 뿌리는 이처럼 확실하다. 그의 부친의 원 고향은 전북 부안으로 알려져 있다.

 

H씨는 지금 하반신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요양원 생활을 하고 있다. 재작년에는 부인을 잃었다. 한때 그리 막역했으며,  통상교섭본부장 자리를 주고받았던 

고향 선후배는 지금 교유(交遊)가 없다. H씨의 근황을 한덕수가 모를리 없지만 그는 국가 대사(大事)나 걱정하지 그런 사사로운 일에 신경쓸 소인배가 아니다.

 

그가 다시 총리에 오르면 한국 관료 중 처음으로 박정희 때 사무관으로 시작해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를 거쳐  

尹 정부에 이르기까지 국록을 받는 유일무이하고, 앞으로도 나올 수 없는 대기록자가 될 것이다. 

 

그는 이미 나라의 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이다. 심지어는 하버드대 석박사도 경제기획원 사무관 신분을 유지한 채 공부했다. 엄청난 특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웬지 참 씁쓸하다. 유일하게 문재인 정부에서만 벼슬 못한 것을 尹당선자 측에서 상대적으로 높이 평가한 건가?

 

카멜레온(Chameleon)은 나무 위에서 순식간에 체색(體色) 변화를 잘 하기로 유명한 도마뱀류이다. '시대의 카멜레온'을 연상케 하는 초고위 관료가 마지막 용틀임을  하고 있다. '공정과 상식'에 맞는 인사(人事)일까? 엔딩(ending)이 궁금해진다.

 

김기만. 전 동아일보 파리특파원, 정치부차장, 노조위원장. 청와대 춘추관장(김대중 정부). 국회의장 공보수석, 초대 게임위원장(노무현정부). 한국방송광진흥공사 사장(문재인 정부) 씀.

 


사진1.한덕수 전 총리.


사진2. 2002년 한일 공동주최 월드컵 한-폴란드 경기(2002.06.02.부산)를 관전하는 김대중 이희호 부부. 

대통령님 뒷편에 조영달 교육문화수석, 김기만 춘추관장(모자). 맨 뒷줄에 장석일 주치의, 김영준 행사비서관. 이 여사 오른 편 두번째가 이근식 행자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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